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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1.06 보라색

textile sckech


낄낄.

학교다닐 땐 아이디어 금새 떠올랐는데..
어린이들 기가 좋긴 좋았나보군.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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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art (팝아트)

팝아트는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미술로 수용한 사조로
예술성 자체의 의미라기 보다는 광고, 산업디자인, 사진술, 영화 등과 같은 대중 예술매개체의
유행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대해 언급된 명칭이다.

'팝 pop'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경향이 있지만 'popular'의 약자로 보는 경향이 유력하다.
즉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題材)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팝아트의 특징은 '개방' 과 '비개성' 으로 집약된다. 이미지의 대중화, 형상의 복제,
표현 기법의 보편화 등에 의해 예술을 개인적인 것에서 대중적인 것으로 개방시킨다.
팝 이미지는 광고, 상표, 만화, 영화등의 대중적 이미지를 한번 더 보기 위한 시각적인
재현으로 대중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현대 인간의 감수성을 의식화한 것이다.

또한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구상적이지만 회화적 사고 그 자체는 추상성이 강하다.
팝아트 작가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 데 그치지않고, 그것을 기호나 기호체계로 사용한다.
특히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
예를 들면, 마릴린 먼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세븐 업의 트레이드 마크,
그리고 디크트레이시의 연속만화 따위를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기호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했다
팝아트에서 유의할 점은 그들의 모방된 사물들은 대체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쪽이 시사성이나 정보 미디어로서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면, 또다른 한쪽은 오락, 취미, 쾌락과
같은 단순한 감각적인 자극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팝아트의 디바라고도 불리는 앤디 워홀은 기계생산, 소비주의와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는 시대가 낳은 새로운 타입의 미술가이자 새로운 종류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인물이다.

 이미 1950년대에 디자이너로서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그가 미술가가 되려고 한 이유는 무엇보다 할리우드 스타처럼 더 유명해지고 더 부유해지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그는 이 스타들이 대중으로부터 가장 주목 받을 시점에 선택하여 실크 스크린 회화로 만들어 그들을 통해서 자신도 스타가 되었다.

 워홀라라는 성을 가진 가난한 슬로바키아 이민 농부의 섯째아들이었던 그는 원 하던 부와 명성을 생전에 이루었고. 그 명성은 그의 이미지와 작품이 그가 닮고자 했던 기계를 통해 다양하게 복제되어 그가 렸던 마릴린 먼로처럼 사후에 도 불멸하는 것을 넘어 더 강하게 커가고 있다.렸던 마릴린 먼로처럼 사후에도 불멸하는 것을 넘어 더 강하게 커가고 있다.




예술가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다면, 세계인 현대적 삶의 예술가는 조수들과 함께 공장의 조립라인과 다르지 않는 방식으로 다량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워홀은 "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개념을 한층 더 미화했는데, 이러한 언명은 실크스크린과 같은 판화기법을 사용하고 자신의 작업에서 사람이 손댄 어떠한 흔적도 제거하고자 했던 깊은 욕구와 모순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사람이 파티를 열고 있는 동안 워홀이 "나는 생활비를 벌어야만 해"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팩토리를 방문한 수많은 사람이 말했음은 언급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 기질이 워홀을 한량 귀족이었던 19세기 예술가들과 구분하는 점이다. 위홀은 성공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았고, 겉치장을 하고, 새 이름을 짓고 멋있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피츠버그 시골뜨기와 그의 친구들은 모든 모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들에게 초대받기에 적절한 화려한 혈통을 갖게 되었다.



1955년 랄프 포머로이의 텍스트와 함께 기발한 모양의 구두 일러스트를 담은

(잃어버린 구두를 찾아서)를 출판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반복을 통해 앤디워홀은 후기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사물의 세계와  그 속에서 인간이 보는 이미지의 세계를 증언한다. 워홀은 '더 이상 원작이 없는 세계의 증인'이다. "서른 개가 한 개보다 낫다." 워홀의 말에서 우리는 벤야민이

일찍이 1930년대에 발견한  현대적 지각의 특성은 196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온전한 형태로, 하지만 벤야민의 기대와 달리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워홀의 복제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 달라진 지각의 욕망이다.

  

 

 

워홀은 자신을 '기계'라 부르고,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장'이라 명명하며, 자신의 작업을 '비즈니스'로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런 그림이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종종 자신의 그림을 만드는 데에 자신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이미지 속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인격의 흔적을 지우고, 그것을 철저하게 익명적으로 보이게 만들려 했다. 워홀에게서 보는 것은 아우라가 벗겨진 새로운 예술가의 상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주체의 죽음' , '저자의죽음'이라는 낯익은 명제의 팝아트적 변형이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맞서 자신의 개인성벽을 관철시키려는 전복적특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워홀은 자신을 무엇보다 대중문화의 스타로 이해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순응적이었다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체가 죽음을 맞고, 역사가 종언을 고하고, 정치적인 것이 사멸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워홀은 이미 오래전에 1980~90년대에 대중의 태도로 일반화되는 어떤 정신적 자세를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1962년 봄 워홀은 이미 인정된 미술계 스타가 되어 있었다.

전문지를 가득 채우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평론들 룩. 타임. 라이프와 같은 대중잡지의 표지들은 일제히 그를 '팝아트의 왕자'라고 찬양했다. 워홀 스스로 " 팝아트를 본적이 있다면, 당신은 광고판을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듯이 워홀의 작업은 무뚝뚝한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 고상한 그들의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반 카프. 어빙 블럼과 같은 젊은 화상들과 쾌활한 유럽인 레오 카스텔리만이 팝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현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았던 세계를 완벽하게 반영했다. 성혁명, 헤이트 애시벨리(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지구. 1960년대 히피와 마약문화의 중심지. 영국 팝밴드. 미니스커트. 그리고 종말을 향해가는 냉전 등이 ( 캠벨 수프 통조림) 의 완벽한 배경을 제공했다.

 

 

 

 

 1965년 초 워홀은 '영화 만드는 것에 전념하기 위해서 회화를 그만두려고 한다'고 공표하였다.

 그해 10월 팩토리 옥상에서 허공에 띄운 그의 첫 (실버 구름)은 그가 "회화를 떤난다"고 선언하는 해프닝이다.

 이것은 당시 회화가 퇴조하던 상황과 그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나온 제스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회화를 통해서 할

 리우드의 스타가 부활되었다면, 그의 영화를 통해서는 슈퍼스타가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1963년 가을 방문이후 ' 옛 할리우드는 끝났고 새 할리우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이곳이 " 망각의 수렁 속에 있

 고 모든 것이 비어있고 공허했다"고 느꼈다. 이 느낌은 특히 그의 흑백 실크스크린에 찍힌 할리우드 스타들의 살도 핏도 없는 모습에

 생생히 표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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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신분에 따라 색이 달라지던 시대에 색은 파워, 즉 권력과 부, 신분의 상징이었다.

보라색은 눈의 촛점을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어서 넓은 면적을 칠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이 색은 모든 색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색이다.
그래서인지 보라색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귀하게ㅜ여겨졌고, 최고의 색으로 취습되었다.


고귀함의 상징

고대부터 중국은 음양오행사상을 바탕으로 우주의 모든 개념을 생각했기 때문에 오방색이 가장 중요한 색이었다. 그러나 태일사상이 부상하면서 적과 흑사이에 있는 자색에 큭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별의 이름으로 관제나 관명을 지었는데, 별의 움직임을 보면 인간의 앞날을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별자리는 천제의 궁전을 의미했다.
이것을 자미원이나 자미궁으로 부르기도했다.
그래서 중국 왕궁 이름 중에는 자금성과 같이 '자'로 시작되는 궁이 많았다.
이후 '자'는 제왕을 의미하게 되었고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황.적.청.백.흑의 오방색이 중심이 되어 의복의 색이 발달했지만 춘추전국시대부터 자색이 두드러지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간색인 자가 정색인 적의 자리를 빼앗는다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견제하기도 했지만 자색의 유행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남북조시대에는 자색이 상서의 색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적.흑의 간색으로 음의 색이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오방색보다 더 상위에 위치한 양의 색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후 중국에서는 자.비.청.황색 순으로 관료들의 복색이 정해졌다. 자색이 가장 높은 최상위직의 복색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내겐 너무 고약한 퍼플

자주색을 의미하는 '퍼플(purple)'은 원래 지중해에 서식하는 달팽이의 이름인 그리스어 '포르피라(Porphyra)'와 라틴어 '푸르푸라(Purpura)'에서 유래되었다.

 고대의 퍼플은 달팽이를 이용해만들었다.
바다에 사는 퍼플달팽이들의 집은 갈색, 흰색의 줄무늬에서 거친 가시와 파이프 모양의 꼬리가 달려 있어서 동물학자들은 퍼플달팽이를 '가시달팽이'라고 불렀다. 다시달팽이는 지중해에 많이 서식하며 오늘날까지도 시장에서 염색재료가 아닌 식품으로 거래되고 있다.

퍼플의 재료는 가시달팽이가 분비하는 무색의 점액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퍼플을 '달팽이의 피'라고 부르기도 했다.
달팽이를 그릇에 넣고 썩히면 점색이 많이 나왔는데, 엄청나게 고약한 냄새가 나서 염색공장이 있는 도시는 악취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썩은 달팽이에서 나온 뿌연 액체를 가열하면 냄새는 더욱 고약해집니다. 이렇게 100L의 죽에서 5L의 염료를 추출합니다. 이 추출물은 뿌연 노란색이며 여기에 담근 모직이나 비단도 뿌연 노란색을 띠지만 햇볕에 말리면 초록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간 빛을 드러내다 점차 보라색으로 변한다. 이렇게 햇볕을 통해 만들어진 보라색은 색이 바래지 않기 때문에 '영원'을 상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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